[알쓸항상]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의 삶을 돌아보다
▷용산서 미국인 조종사 비행을 보고 조종사 꿈꿔
▷금강호 타고 고국으로 돌아와…이후 독립운동 시작
▷비행훈련 중 사고로 안타깝게 목숨 잃어
출처=클립아트코리아
[위즈경제] 류으뜸 기자 =“경성의 한울(하늘)! 경성의 한울! 내가 어떠케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르는 경성의 한울! 이 한울에 내 몸을 날리울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개벽 제31호,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中)
1922년 12월 10일 한 대의 비행기가 경성 하늘을 날아올랐습니다. 조종사 이름은
안창남. 한국인이 한반도 하늘을 처음으로 비행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를
보기 위해 여의도 비행장에 모인 사람만 5만여명에 달했고, 하늘에선
비행기에서 뿌린 오색 전단이 흩날렸습니다. 서울과 인천 하늘에서 선보인 고국 방문 비행은 일본인과 서양인의
비행만 보던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줬습니다.
#소년, 조종사를 꿈꾸다
1901년 3월 서울의
북촌인 평동에서 태어난 안창남은 1919년 서울 용산에서 열린 미국인의 조종사 곡예 비행을 보게 됩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외국인이 탄 비행기를 목격한 11시 안창남은 “그까짓 것 우리 조선 사람도 배우면 하지”라는 ‘패기’로 조종사의 꿈을 갖게 됩니다.
이후 곧바로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8세에 계모의 돈을 훔쳐 도일해 1920년 도쿄에 있는 고구리 비행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는 입학 3개월 만에 3등
비행사 면허장을 딴 데 이어 다음해 5월에 일본에서 실시된 제1회
조종사 면장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조종사가 됩니다. 당시 시험에 17명이 응시했고 합격자는 그를 포함 2명뿐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한 달 뒤 지바에서 열린 민간항공대회에서는 2등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런 소식이 고국에 알려지자 국민들은 축제 분위기에 들뜨게 됐고 1922년
12월 10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모국방문비행대회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안창남은 5만여명(당시 경성 인구는 30만여 명)의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안창남이 탄 비행기는 단발쌍엽(單發雙葉)의 1인승 ‘금강호(金剛號)’. 일본 오쿠리 비행학교 소속의 영국제 비행기였습니다. 금강호는 여의도를 이륙해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비행기는 남산을 돌아
창덕궁 상공을 거쳐 여의도 상공에서 고공비행의 묘기를 선보였습니다. 당시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워준 비행이었습니다.
#식민지 아이돌에서 독립운동 투사가 되다
고국 비행을 계기로 안창남의 삶도 선회했습니다. 모국의 애국지사들과의
만남에 이어 간토 대지진 직후 한인 학살을 목격한 안참남은 인기 비행사의 삶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산시성 비행학교 교관으로 활약하며 항일독립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만 29살이던
1930년, 안창남은 비행훈련 중 추락해 공중의 별로 사라졌습니다.
식민지 조선 최고의 아이돌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에도 투신해 불꽃 같은 삶을 산 안창남.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패배감을 떨쳐내고 한국인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줬습니다. 그가 하늘의 별로 사라진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들의 가슴을 벅차게 하는 진정한 최초의 비행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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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냐가 토론의 장이되야한다는 말씀 공감하며 중증발달장애인의 또다른 자립주택의 허상을 깨닫고 안전한 거주시설에서 자립적인 생활을 추구하여 인간다운 존엄을 유지할수있도록 거주시설어 선진화에 힘을 쏟을때라 생각합니다 충분한 돌봄이 가능하도록 돌봄인력충원과 시설선진화에 국가에서는 충분한 제도적 뒷받침을 해야합니다
2시설이 자립생활을 위한 기반이 되야합니다. 이를위해 전문인력이 배치되고, 장애인의 특성과 욕구를 반영한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지역사회와 연계된 지원체계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장애인이 보호받으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공간으로 거주시설을 개선하고 지원 되이야 가족도 지역사회에서도 안심할 수 있게 정책개발 및 지원 해야 한다는 김미애의원의 말씀에 감동받고 꼭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래 봅니다.
3중증발달장애인의 주거선택권을 보장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바랍니다. 탈시설을 주장하시는 의원님들 시설이란 인권을 빼앗는 곳이라는 선입관과 잘못된 이해를 부추기지 마세요. 중중발달장애인을 위해 노화된 시설을 개선해 주세요. 또, 그들의 삶의 보금자리를 폐쇄한다는 등 위협을 하지 마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4지역이 멀리 있어서 유트브로 시청했는데 시설장애인 부모로 장애인들이 시설이든 지역이든 가정이든 온전히 사회인으로 살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5탈시설 개념에 대해 페터 슈미트 카리타스 빈 총괄본부장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게재된 탈시설화는 무조건적인 시설 폐쇄를 의미하지 않으며 장애인 인권 향상을 위한 주거 선택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 발달장애인의 거주 서비스는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경우, 도전적 행동이 있는 경우, 자립 지원이 필요한 경우 등 여러 거주 서비스 필요성에 의해 장기요양형 거주 시설부터 지역사회 내 자립홈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번 토론회를 통해 거주시설에서의 자립생활 목소리가 정책으로 연결되길 기대합니다.
6장애인도 자기 삶을 결정하고 선택 할 귄리가 있습니다. 누가 그들의 삶을 대신 결정합니까? 시설에서 사느냐 지역사회에서 사느냐가 중요 한게 아니고 살고 싶은데서 필요한 지원을 받으며 살아야합니다. 개인의 선택과 의사가 존중되어야 합니다.
7최중증 발달장애인의 거주시설에서의 생활은 원가정을 떠나 공동체로의 자립을 한 것입니다. 거주시설은 지역사회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시설안과 밖에서 너무도 다양하게 활동합니다. 원가정이나 관리감독이 어려운 좁은 임대주택에서의 삶과 다른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야 말로 장애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성이 향상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가장 안전한 곳 입니다. 최중증발달장애인들이 아파트나 빌라에서 살아가기란 주변의 민원과 벌래 보듯한 따가운 시선 그리고 돌발행동으로 위험한 상황이 많이 일어나고 그때마다 늙고 힘없는 부모나 활동지원사는 대처할수 있는 여건이 안되고 심지어 경찰에 부탁을 해 봐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 현실 입니다. 그러나 거주시설은 가장 전문성이 있는 종사자들의 사명과 사랑이 최중증발달장애인들을 웃게 만들고 비장애인들의 눈치를 안봐도 되고 외부활동도 단체가 움직이니 그만큼 보호 받을수 있습니다 . 예로 활동지원사가 최중증발달장애인을 하루 돌보고는 줄행랑을 쳤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