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추가 계좌줘도 못 막아"...사기꾼 웃는 로맨스스캠 구조①
▷'피해 조회' 없으면 지급정지 못해...사후 증빙 중심 메뉴얼이 만든 공백
▷'의심 계좌' 영장 문턱에 막혀 강제수사도 난항...금전법 한계까지 겹처
최근 기승을 부리는 '로맨스스캠'이 수사 기관의 지지부진한 대응과 낡은 매뉴얼 속에 무방비로 방치되고 있다. 일러스트=챗GPT로 생성된 이미지
[위즈경제] 류으뜸 기자 =[기획의도]오늘날 금융사기는 기술 발전과 함께 지능화하고 있다. 인공지능, 가상자산, 정교한 심리 조작이 결합한 신종 사기 수법이 빠르게 확산하지만, 이를 막아야 할 법령과 수사기관의 매뉴얼은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본지는 로맨스스캠 피해자 김 씨(가명)의 사례를 통해 수사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점검하고, 제도 개선 방향을 모색한다.
"공범으로 추정되는 외국계 은행 고객센터라는 곳에서 추가 금액의 송금을 유도하는 계좌번호를 보내와 즉시 담당 수사관에게 알렸지만 경찰은 실제 피해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답했다. 현재 시스템은 사실상 추가 피해를 방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해자 김 씨 의 말이다. 최근 기승을 부리는 '로맨스스캠'이 수사 기관의 지지부진한 대응과 낡은 매뉴얼 속에 무방비로 방치되고 있다.
10일 위즈경제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로맨스스캠 피해자 김 씨는 고소인 조사를 마친 뒤 피의자로부터 추가 송금을 유도하는 '새로운 계좌' 번호를 받았다. 김 씨는 정황상 사기 계좌임을 느끼고 즉시 수사관에게 이를 알리며 지급정지 등 선제적 조치를 요청했다. 피의자를 특정하거나 최소한 추가 피해를 말을 수 있는 결정적 단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사관은 "해당계좌로 피해본 사실이 조회되지 않아서 당장의 조치는 곤란하다"고 답변했다. 이후 본지 기자가 해당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수사관에게 통화를 시도했으나 "현재 조사 중인 사안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피해 조회' 없으면 못 막아...선제적 조치 어려운 이유
수사관이 ‘피해 조회’를 근거로 조치를 미룬 배경에는 현행 대응 체계가 ‘이미 피해금이 입금된 계좌’에 맞춰 설계돼 있다는 구조적 한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통상 지급정지나 거래 제한은 △피해자가 실제로 송금한 내역 △해당 금액이 입금된 계좌 △피해 사실을 뒷받침하는 신고·접수 기록 등 사후적으로 확인 가능한 증빙을 토대로 이뤄진다.
반대로 사기범이 새로 던진 계좌는 아직 피해자의 송금이 발생하지 않았거나, 신고 데이터베이스상 ‘피해 계좌’로 등록되지 않은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수사기관이나 금융기관이 곧바로 지급정지를 요구·시행하면 계좌 명의자가 실제로 무관한 제3자일 때 오인 정지 논란과 손해배상 등 법적 분쟁 소지가 생긴다는 이유로 내부 매뉴얼이 보수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피해 사실 조회’가 없다는 답변은 결국 “현 단계에서 강제 조치를 정당화할 객관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 경찰 관계자는 위즈경제와의 통화에서 “지급정지는 사실상 강제 조치라 실제 피해 송금 등 객관적 근거가 확인돼야 요청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오인 정지로 인한 민원과 법적 분쟁 부담이 커 현장에서도 즉각 시행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피의자 특정 못해 강제처분도 어려워
또 다른 제약은 '의심 계좌' 단계에서 수사 기관이 곧바로 강제수사에 착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로맨스스캠은 피의자 특정이 쉽지 않고 명의·계정 도용 가능성도 커, 계좌추적·통신자료 조회·압수수색 같은 강제처분을 위한 영장 요건을 충족하기가 까다롭다는 설명이다.
수사 절차상 강제처분은 경찰이 필요성을 정리해 검찰에 영장을 신청하고 검찰이 법원에 청구한 뒤 법관이 발부하는 단계를 거친다. 현장에서는 이 과정에서 ‘구체적 피해 사실’과 ‘강제수사의 필요성’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으면 검찰 단계에서 보완을 요구받거나, 법원 단계에서 영장 발부가 지연·불발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실제 송금이 확인되기 전인 ‘의심 계좌’ 국면에서는 혐의의 상당성을 설명하기가 더 까다로워, 수사가 초기에 멈춰 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범죄의 심리학』을 펴낸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은 위즈경제와의 통화에서 "로맨스 스캠은 피의자를 특정하기 어렵고 도용 가능성이 커, 헌법상 영장주의 원칙에 따라 법원이 강제처분 영장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며 "경찰이 영장을 신청해도 검찰과 법원이 '명백한 피해 사실'을 요구하기 때문에, 돈을 송금하기 전인 '사기 미수' 단계에서는 사실상 계좌 압수나 통신 조회가 불가능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특별법 적용 공백...로맨스스캠 '금융사기'로 묶기 어려워

보이스피싱 등 전형적인 전기통신금융사기를 전제로 지급정지 근거를 규정하고 있어, ‘재화의 공급·용역 제공’을 가장한 로맨스스캠 유형은 적용 과정에서 공백이 발생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위즈경제
현행 제도의 한계도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급정지 등 긴급 조치는 통상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로맨스스캠은 범행 구조가 전형적인 ‘보이스피싱형 계좌이체 사기’와 달라 적용 과정에서 공백이 발행하고 있다. 특히 로맨스스캠은 피해자와의 관계 형성, 명목 만들기, 단계적 송금 유도 등 ‘거래·용역 제공을 가장한 사기’ 형태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범행을 특별법상 전기통신금융사기로 명확히 특정하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지급정지 요청의 근거가 약해지거나 절차가 지연될 수 있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재화의 공급 또는 용역의 제공’을 내세워 돈을 요구하는 방식은 물품 배송, 사업 조력, 행정 처리 대행 등을 명분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형태를 말한다.
실제 김 씨 사례를 보면 그는 영국 의사를 사칭한 인물로부터 ‘퇴직 신청 조력’ 등 용역을 제안받았고, 이후 계좌 제한을 풀기 위한 ‘범칙금’과 ‘송금 수수료(COT 코드)’ 명목으로 거액을 송금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사법 절차에서 이런 유형은 ‘개인 간 관계를 이용한 일반 사기’로 분류된다. 피해자가 속았더라도 본인 의사로 이체를 실행했다는 형식이 남아 ‘긴급 차단’ 조치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해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위즈경제가 진행하는 장기 심층취재 시리즈입니다. 불법사금융, 전세사기, 보이스피싱 등 점점 더 정교해지고 악질적으로 변하는 범죄들과 사회적 부조리 속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일상과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피해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실효성 없는 제도와 소극적인 보호뿐입니다. 가해자는 진화하고 있지만, 법과 제도는 여전히 느리고, 그 책임은 여전히 남의 일입니다. 왜 피해자만이 끝까지 남아서 홀로 그 큰 무게를 감당해야 할까요? 이에 본지는 반복되는 피해의 이면에 있는 구조적 문제를 짚고, 피해자가 사회에서 더 이상 '관리 대상'이나 '부주의한 개인'으로 낙인 찍히지 않도록 목소리를 모으고자 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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