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바이오헬스] ②정부는 왜 ‘바이오 데이터’에 국가 전략을 걸었나
▷ 추격 전략의 한계… R&D 중심 접근이 멈춘 지점
▷ ‘국가 승인형 개방 체계’라는 새로운 실험
AI가 바이오헬스 산업의 게임체인저로 부상하면서, 실험 중심 R&D에서 데이터·알고리즘 중심 구조로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다.(그래프=한국은행 경제연구원)
[위즈경제] 조중환 기자 = 한국 바이오헬스 산업은 오랜 기간 ‘빠른 추격자 전략’을 통해 성장해왔다. 바이오시밀러와 위탁생산(CDMO) 등 비교적 진입 장벽이 낮은 영역을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에 안착했고, 일부 기업은 세계적인 생산 역량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혁신 신약과 첨단 의료기기 분야에서는 여전히 선도국과의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은 보고서에서 “기존의 틈새시장 중심 추격 전략만으로는 원천기술과 혁신 역량의 격차를 단기간에 해소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단순히 연구개발(R&D) 예산을 늘리고, 개별 기업의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방식만으로는 산업 구조 자체를 바꾸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보고서는 바이오헬스 산업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핵심 과제로 ‘바이오 데이터 활용 기반 구축’을 전면에 내세웠다.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작동하게 만드는 토대에 주목한 것이다.
◇ 게임체인저로 떠오른 ‘데이터’
보고서는 최근 AI 기술의 발전이 바이오헬스 산업의 경쟁 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고 분석한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 AI는 후보 물질 탐색, 독성 예측, 임상시험 설계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의료기기와 진단 영역에서도 데이터 기반 알고리즘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는 명확하다. 대표성을 갖춘 대규모 고품질 데이터다. 보고서는 바이오 데이터를 “개발을 위한 핵심 투입 요소이자, 그 자체로 높은 가치를 지닌 전략적 자산”으로 규정했다. 더 이상 데이터는 연구의 부산물이 아니라, 산업 경쟁의 출발점이 됐다는 의미다.
문제는 앞선 1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이 데이터 보유국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산업적 가치로 전환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정책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핵심 해법은 ‘국가 승인형 바이오 데이터 개방 체계’
한국은행이 제시한 해법의 중심에는 ‘국가 승인형 바이오 데이터 개방 체계’가 있다. 이는 무분별한 데이터 개방이나 규제 완화와는 결이 다르다. 핵심은 사전 심사와 신뢰다. 공익성과 연구 타당성을 충족한 경우에 한해 국가가 데이터 활용을 승인하고, 승인된 연구에는 데이터 접근과 활용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구상이다.
보고서는 현행 바이오 데이터 활용 방식이 △정보주체 동의 기반 이용 △익명정보 활용 △가명정보 처리 후 이용 등으로 나뉘어 있지만, 실제 연구·산업 현장에서는 복합적인 법적 요건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활용이 위축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가 승인형 체계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국가가 ‘신뢰 보증자’로 나서 데이터 활용의 기준을 명확히 하고, 승인된 연구에 대해서는 사전 동의 면제 등 규제 완화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개인정보 보호와 활용을 대립 개념이 아니라, 신뢰를 매개로 한 상호 보완적 가치로 재설계하겠다는 접근이다.
◇ 왜 ‘국가’가 나서야 하나
보고서는 이 역할을 민간이나 개별 기관에 맡기기 어렵다고 본다. 바이오 데이터는 비경합적 성격을 지닌 공공재적 자산이지만, 동시에 민감한 개인정보를 포함한 고위험 자산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개별 기관이 데이터 개방과 활용에 나설 경우, 법적·평판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구조가 형성돼 있다.
실제로 해외 사례에서도 공공 주도 모델의 한계는 확인된다. 핀란드의 경우 공공 주도로 데이터 개방 체계를 구축했지만, 과도한 행정 절차와 승인 지연으로 인해 활용 속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국가가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하기보다는, 민간이 자율적으로 고품질 데이터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장 조성자’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기대 효과는 분명하다
보고서는 국가 승인형 바이오 데이터 개방 체계가 구축될 경우, 바이오헬스 산업 전반에 걸친 파급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내다본다. 데이터 접근 창구를 일원화하면 연구 속도와 효율성이 높아지고, 신약과 의료기기 개발 비용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나아가 글로벌 제약사·의료기기 기업과의 국제 공동 연구와 투자 유치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시됐다.
이는 단순한 산업 육성을 넘어,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전략으로도 읽힌다.
◇ 전략은 완성됐지만, 질문은 남았다
다만 보고서는 이 전략이 만능 해법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제도가 설계됐다고 해서 곧바로 데이터가 흐르고 혁신이 촉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사회적 신뢰, 데이터 제공에 대한 국민의 인식, 공공과 민간 간 역할 분담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누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목적으로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는 제도 역시 작동하기 어렵다. 보고서가 강조한 ‘신뢰 기반’이라는 전제는 결국 정책의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다.
다음 편에서는 이 전략이 실제 현장에서 어떤 쟁점과 한계를 마주하게 될지, 개인정보 보호와 산업 활용 사이의 긴장 관계는 어떻게 조정될 수 있을지를 집중적으로 짚는다. 바이오 데이터 전략의 성패를 가를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첨단 바이오헬스 산업은 신약 개발과 정밀의료, 디지털 헬스케어 등 미래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산업 경쟁력의 핵심은 개별 기술을 넘어 ‘데이터 활용 역량’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방대한 임상·유전체·의료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바이오 데이터는 기관별로 분절돼 산업적 활용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이에 본지는 9일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이 발간한 'BOK 이슈노트: 첨단 바이오헬스 산업 육성방안'을 토대로, 바이오 데이터 활용 기반 구축의 필요성과 정책적 방향, 그리고 현장에서 마주할 과제를 3편의 기획연재로 점검한다. 데이터 중심 산업 전환이 실제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위해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를 짚어본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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