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운 한국기업회생협회 회장
기업(법인)회생절차는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지만 잠재적 가치(계속기업가치)가 있는 기업을 살려내 경제 생태계의 복원에 기여하는 제도다. 하지만 현실에서 '회생기업'이라는 꼬리표는 기업의 재기를 가로막는 '낙인효과(stigma effect)'로 작용해 수많은 기업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2019~2023년 기업회생 통계. 표=위즈경제
통계가 그 현실을 보여준다. 2023년 기준으로 회생인가를 받은 기업 4곳 중 1곳이 법원으로부터 회생폐지 판정을 받았다. 물론 모두 낙인효과 때문이라 단정 할 순 없다. 회생계획안을 불성실하게 이행했거나 제도적 보호를 악용해 경영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현장의 대다수 회생기업인들은 낙인으로 기업 정상화 기회를 잃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낙인효과가 어떻게 기업의 재기를 막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제도상으로 기업 재건의 문이 열렸지만 시장의 현실은 닫혀있는 구조적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
◇회생이라 부르지만 실제는 사형선고?
기업이 회생 개시결정이 되면 은행전산망에 연체기록이 공유되면서 신용이 D등급이 된다. 그리고 기업 등기부등본에 회생날짜, 법원, 사건번호가 기재가 된다. 이 순간부터 시장은 냉정하게 반응한다. 협력업체들은 연쇄 부도의 위험을 우려해 거래를 중단하거나, 현금 결제를 요구하는 등 거래 조건을 까다롭게 만든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으로부터 신규자금을 조달하기도 어렵다. 이런 악순환이 이어지면 기업의 영업활동은 마비되고 불안감을 느낀 핵심 인력들까지 회사를 떠나면서 기술력과 조직 역량이 무너진다.
실제로 자본시장연구원의 분석에서도 기업회생 신청 사실 공개로 인한 신인도 하락과 거래 조건 악화, 신규 자금 조달의 어려움이 정상화를 지연시키는 단점으로 지적된다. 결국 회생을 통해 살리려던 기업이 외부의 싸늘한 시선과 거래 단절이라는 '낙인효과' 때문에 오히려 파산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회생'을 '부활'로 바꾸는 사회적 시스템 구축 필요
기업 회생은 재도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제도적 장치 못치않게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회생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재기에 성공한 기업들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알림으로써 회생을 ‘사형선고’가 아닌 ‘세컨드 찬스(Second Chance)’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정부와 언론은 기업의 회생 노력을 격려하고 재도전이 존중받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제도적으로는 낙인의 굴레를 벗길 ‘기업신용사면제도’ 도입이 시급하다. 법원의 인가를 받은 기업은 이미 채무 구조조정을 완료해 재무적으로 안정된 상태임에도 은행 전산망에는 여전히 ‘D등급’의 연체 기록이 남아 금융 거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는 회생을 인정한 법원의 판단과 시장의 현실이 엇갈리는 대표적인 모순이다.
인가기업에 대한 신용 회복 절차를 마련해 정상적인 금융 활동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회생기업에 대한 DIP 자금(신규 자금 지원) 유입을 촉진해야 한다. 정상화를 위해 신규 계약을 따내도 원자재 구입과 운영비 부족으로 매출을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회생기업에 투자하는 금융기관과 민간 자본에 세제 혜택이나 정책금융 인센티브를 제공해 ‘마중물 자금’이 흘러들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이행보증보험 적용 확대도 필요하다. 회생기업은 영업을 재개해도, 신용등급 문제로 이행보증보험에 가입하지 못해계약 자체가 무산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청산가치보다 계속기업가치가 높다고 평가되는 기업이라면, 이행보증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 예외를 마련해야 한다.
◇낙인을 넘어, 진짜 회생으로
회생제도는 위기에 처한 기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사회의 안전망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제도가 열어놓은 문을 시장이 닫아버리는 역설로 가득하다. 법이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한 기업이, 신용의 굴레와 냉정한 시선 속에서 다시 쓰러진다면 그것은 기업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실패다.
회생은 단지 채무 조정의 절차가 아니라, 사람과 일터, 기술과 시장을 다시 세우는 ‘부활의 과정’이어야 한다. 이 제도가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사회가 낙인을 걷어내고 두 번째 기회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회생을 부끄러움이 아닌 도전으로, 실패를 끝이 아닌 시작으로 바라보는 문화가 뿌리내릴 때 비로소 제도는 완성된다.
회생의 길이 가시밭길이라면 그 끝에는 부활의 길이 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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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운 한국기업회생협회 회장 약력
윤병운 회장은 현재 (사)한국기업회생협회 회장으로서 법인회생 절차의 실효성 제고와 제도개선을 위한 연구·자문 활동을 이끌고 있으며, (사)한국M&A컨설팅협회 사무총장과 한국중소기업금융협회 총괄부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또한 ㈜콘체르트파트너스 대표이사와 ㈜매칭코리아 사장으로 재직하며, 중소·중견기업의 회생·인수합병 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법률·회계 분야에서는 로펌 윈앤윈(기업회생 및 M&A)과 바로회계법인(경정청구)의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서강대학교 바이오기술 투자전문인력양성센터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그는 SK그룹 임원 후보 대상 M&A 강사이자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M&A 강사로서, 기업 구조조정과 투자 실무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