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는 왜 비즐리에 81억파운드를 썼나…국내 보험사가 배울 점은?
▷사이버보험 등에 강점을 지닌 영국 비즐리 인수 추진
▷세 차례 거절 끝에 주가보다 59.8% 높은 가격 제시
▷국내 보험사도 외형보다 전문인력·현지 진출 기반 확보해야
스위스 대형 보험사 취리히 보험(Zurich Insurance). 사진=홈페이지 캡쳐
[위즈경제] 류으뜸 기자 =스위스 보험그룹 취리히가 영국의 특화보험사 비즐리를 약 81억파운드에 인수하기로 했다. 취리히는 비즐리 인수를 통해 사이버·해상보험 등 전문 분야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영국 로이즈시장을 발판으로 글로벌 사업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두 회사의 협상은 순탄하지 않았다. 취리히는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인수를 제안했지만 비즐리는 가격이 낮다며 거절했다. 결국 취리히가 비즐리 주가보다 약 60% 높은 가격을 제시하면서 합의가 이뤄졌다.
이번 거래는 보험회사의 해외 인수가 단순히 회사 규모를 키우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내 보험사도 해외에 진출할 때 현지 회사의 이름이나 판매망뿐 아니라 전문인력과 위험평가 능력까지 확보할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10일 보험연구원이 발간한 ‘영국 보험 M&A의 주요 유형과 시사점: Zurich의 Beazley 인수 사례 분석’에 따르면 취리히는 비즐리 인수를 통해 특화보험 수입보험료를 기존 약 90억달러에서 150억달러로 늘릴 계획이다.
특화보험은 사이버공격이나 해상사고, 정치적 불안 등 일반적인 보험으로 다루기 어려운 위험을 보장하는 보험을 말한다. 위험의 크기와 발생 가능성을 판단하기 어려워 전문인력과 축적된 경험이 특히 중요하다.
◇사이버보험 강자 인수해 로이즈시장까지 진출
비즐리는 1986년 영국 로이즈 신디케이트로 출발해 대형 특화보험사로 성장했다. 2025년 기준 수입보험료는 61억달러다. 특화보험과 재산보험, 사이버보험을 비롯해 해상·항공·정치위험 등 복잡한 위험을 다루고 있다.
특히 비즐리는 사이버보험 분야에서 강한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일반 보험사가 판단하기 어려운 새로운 위험을 분석하고, 사고 발생 가능성에 맞춰 보험료를 정하는 전문적인 보험 인수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
취리히가 비즐리를 인수하려는 가장 큰 이유도 이 같은 전문성 때문이다. 비즐리의 인력과 경험을 확보하면 취리히가 직접 오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전문 조직을 만드는 것보다 빠르게 특화보험 사업을 키울 수 있다.
글로벌 보험시장 진출에 필요한 기반도 함께 얻는다. 비즐리는 현재 7개의 로이즈 신디케이트를 관리하고 있다. 로이즈는 여러 보험회사가 모여 대형·특수 위험을 나눠 인수하는 영국의 대표적인 글로벌 보험시장이다.
로이즈는 약 80개의 보험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으며 200개 이상 지역에서 재보험을 인수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취리히는 비즐리를 통해 로이즈시장과 글로벌 특화보험시장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지난해부터 협상…가격 올린 끝에 인수 합의
취리히는 지난해 6월부터 비즐리에 여러 차례 인수를 제안했다. 당시 주당 최대 1315펜스를 제시했지만 비즐리 이사회는 회사의 가치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며 거절했다.
취리히는 올해 1월에도 주당 1230펜스와 1280펜스를 차례로 제안했다. 비즐리는 독립회사로 계속 성장할 가능성과 사업 전망에 비해 가격이 낮다고 판단해 두 제안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협상은 취리히가 가격을 다시 높이면서 진전됐다. 두 회사는 지난 2월 주당 총 1335펜스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최종 조건은 주당 1310펜스의 현금과 25펜스의 배당을 비즐리 주주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현금 인수대금은 인수 추진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전 비즐리 종가인 주당 820펜스보다 59.8% 높다. 취리히가 비즐리의 전문성과 시장 진출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상당한 추가 금액을 지급한 것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특화보험은 상품이나 판매망보다 위험을 평가하고 보험료를 제대로 정할 수 있는 인력과 경험이 중요하다”며 “취리히가 높은 가격을 제시한 것도 비즐리의 전문인력과 로이즈시장 진출 기반을 직접 확보하기 위해서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열린 비즐리 법원총회와 주주총회에서는 참석 주주의 99.9%가 인수안에 찬성했다. 앞으로 금융당국의 승인과 영국 법원의 인가 등을 거치면 올해 하반기 인수가 마무리될 예정이다.
취리히는 인수를 통해 중기적으로 매년 10억달러 이상의 추가 매출 기회를 얻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29년까지 연간 약 1억5000만달러의 비용을 줄이고, 거래 완료 후 2년 안에 약 10억달러의 자본 활용 효과도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회사를 사는 것보다 전문인력 지키는 일이 중요
인수가 끝났다고 곧바로 성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비즐리의 전문인력과 기업문화를 유지하면서 취리히의 자본력과 글로벌 영업망을 결합해야 한다.특화보험은 담당자의 경험과 판단이 수익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수 이후 비즐리의 핵심 인력이 회사를 떠나거나 취리히가 기존 업무방식을 지나치게 바꾸면 기대했던 효과가 줄어들 수 있다.
취리히가 비즐리라는 회사 이름과 런던의 운영체계, 핵심 보험 인력과 기업문화를 유지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문혜정 보험연구원 연구원은 국내 보험회사도 해외 특화보험시장에 진출할 때 어떤 전문성을 확보하려는 것인지부터 분명하게 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방법은 현지 회사와 협력하거나 지분 일부를 사는 방식부터 로이즈 신디케이트에 자본을 투자하거나 회사 전체를 인수하는 방식까지 다양하다. 많은 지분을 확보할수록 경영권과 전문 역량을 직접 가져올 수 있지만 투자금과 인수 후 통합 부담도 커진다.
또 다른 보험업계 관계자는 “국내 보험사가 해외 회사를 인수했다는 사실 자체를 성과로 봐서는 안 된다”며 “핵심 인력이 인수 이후에도 남을 수 있는지, 국내 본사의 업무방식과 현지의 전문성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까지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취리히의 비즐리 인수는 해외 보험회사의 이름이나 외형보다 사람이 보유한 경험과 시장 진입 기반에 더 큰 가치가 매겨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내 보험사 역시 해외 거점을 늘리는 데 앞서 현지 회사의 전문인력과 기술, 영업 기반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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