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 1300억원 모듈러교실 계약…‘가족업체 담합’에 학교 예산 줄줄
▷권익위, 초·중·고 모듈러교실 카탈로그 계약 입찰담합 실태조사 결과 발표
▷최근 4년간 담합 혐의 99건·1300억원 규모…전체 발주물량 324건의 31%
▷특정업체 유리한 평가항목·실내공기질 측정 부실도 확인…공정위·경찰청 등 이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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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경제] 조중환 기자 = 학교에 임시 교실이 필요해졌다. 증축 공사나 과밀학급 해소, 시설 개선 과정에서 학생들이 당장 수업을 받을 공간이 필요할 때 설치되는 것이 모듈러교실이다. 문제는 이 교실이 실제 경쟁을 통해 적정 가격에 공급됐느냐다. 국민권익위원회 조사 결과, 일부 업체가 가족·친족 관계로 얽힌 업체들과 함께 입찰에 참여해 경쟁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낙찰가격을 끌어올린 정황이 적발됐다.
결과는 학교 예산 부담으로 이어졌다. 권익위는 피신고 업체들의 입찰담합으로 인해 카탈로그 계약 방식의 모듈러교실 가격이 총액계약 방식보다 모듈러당 최대 3배 이상 높아졌다고 밝혔다. 학생들이 쓰는 임시 교실이 담합 구조 안에서 비싸게 공급됐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국민권익위원회는 14일 초·중·고 모듈러교실 카탈로그 계약 입찰담합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권익위는 지난 3월 특정 업체가 유착관계 업체들과 동시에 입찰에 참여해 가격 경쟁을 왜곡하고 낙찰가격 상승을 초래했다는 부패 신고를 접수한 뒤, 전국 13개 지역 33개 초·중·고등학교의 모듈러교실 카탈로그 계약 전반을 현장조사했다.
조사 결과 가족·친족으로 구성된 피신고 업체들의 입찰담합 혐의가 확인됐다. 최근 4년간 입찰담합 혐의 규모는 총 99건, 1300억원에 달했다. 이는 계약 전체 발주물량 324건의 약 31%에 해당한다. 업체별로는 담합을 주도한 A업체가 76건, 1000억원을 수주했고, B업체는 23건, 293억원을 수주했다. C업체는 이른바 ‘들러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권익위는 설명했다.
◇ ‘경쟁입찰’처럼 보였지만…실제론 가족·친족 업체가 나눠
이번 사안의 핵심은 카탈로그 계약 제도의 허점이다. 카탈로그 계약은 조달청 나라장터 종합쇼핑몰 등에 등록된 제품 중 수요기관이 조건에 맞는 제품을 선택해 계약하는 방식이다. 빠르게 물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업체들이 사전에 가격과 참여 방식을 맞추면 형식상 경쟁만 남고 실제 가격 경쟁은 약해질 수 있다.
권익위 조사에서 드러난 구조도 이 지점에 있다. 특정 업체와 유착관계에 있는 업체들이 동시에 입찰에 참여하면, 겉으로는 여러 업체가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낙찰 받을 업체와 들러리 업체가 사실상 정해져 있다면, 발주기관은 정상적인 시장가격을 확인하기 어렵다. 낙찰가격이 높게 형성돼도 ‘입찰 절차를 거쳤다’는 외형 때문에 문제를 바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특히 이번 사안은 업체 관계가 가족·친족으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단순한 가격 협의보다 더 구조적이다.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업체들이 분리된 사업자인 것처럼 입찰에 들어가면 경쟁의 외형만 만들 수 있다. 학교와 교육청 입장에서는 여러 업체가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공정성이 확보됐다고 판단하기 쉽지만, 실제 소유·지배 관계와 거래 패턴까지 보지 않으면 담합을 걸러내기 어렵다.
권익위는 피신고 업체 2개사가 최근 4년간 99건, 1300억원 규모의 계약을 담합한 것으로 봤다. 전체 발주물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특정 업체가 반복적으로 수주하고, 다른 업체가 들러리로 참여하는 구조가 장기간 이어졌다면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공정위와 경찰청 등 관계기관의 후속 조사에서 실제 담합 여부와 책임 범위가 가려질 전망이다.
◇ 모듈러당 최대 3배…예산 낭비 넘어 학생 안전 문제
이번 조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수치는 ‘최대 3배’다. 권익위는 담합 혐의로 인해 카탈로그 계약이 총액계약 방식보다 모듈러당 최대 3배 이상 가격 상승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히 업체가 부당이득을 얻었다는 의미를 넘어, 교육 예산이 비효율적으로 쓰였을 가능성을 뜻한다.
모듈러교실은 일반 물품과 다르다. 학생과 교사가 실제로 머무는 공간이다. 냉난방, 환기, 소음, 실내공기질, 안전성 등이 수업 환경과 직결된다. 가격이 높아졌다면 그만큼 품질 관리도 엄격해야 하지만, 권익위는 납품 등 계약 과정에서 실내공기질 측정 부실 등 규정 위반행위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 대목은 이번 사건을 단순한 조달 비리로만 볼 수 없게 만든다. 담합으로 가격이 올라갔고, 동시에 품질 관리까지 부실했다면 피해는 예산에 그치지 않는다. 교실을 이용하는 학생과 교사의 건강·안전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권익위가 “모듈러교실의 품질은 학생과 교사의 안전과 건강에 직결된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학교 현장에서 모듈러교실은 앞으로 더 자주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노후 학교 시설 개선, 과밀학급 완화, 공간 재배치, 그린스마트스쿨 등 교육환경 개선 사업이 이어지면 임시 교실 수요도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장에서 담합이 구조화되면 교육재정은 계속 새고, 학생들은 더 비싼 비용을 들인 공간에서도 충분한 품질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
◇ 평가항목부터 납품까지…계약 전 단계가 허술
권익위는 이번 조사에서 계약 단계별 문제도 짚었다. 설계 단계에서는 카탈로그 계약의 경우 제안가격 선정에 관한 기준이 없어 담합을 통해 제안가격이 높게 산정되고 낙찰가격도 상승하는 결과가 초래됐다고 봤다.
발주 단계에서는 특정 업체에 유리한 항목이 평가항목으로 채택돼 피신고 업체가 낙찰되도록 한 정황이 확인됐다. 이는 가격 담합뿐 아니라 발주기관의 평가 기준 설계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평가항목이 특정 업체의 제품 사양이나 실적에 맞춰지면, 다른 업체는 형식적으로 참여하더라도 실제 경쟁이 어렵다.
납품과 계약 이행 과정에서도 실내공기질 측정 부실 등 규정 위반이 확인됐다. 결국 문제는 입찰 한 순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설계 단계의 가격 기준 부재, 발주 단계의 평가항목 왜곡, 납품 단계의 품질 관리 부실이 이어지면서 계약 전반의 통제 장치가 작동하지 않은 셈이다.
권익위는 입찰 비리 혐의가 있는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과 추가 비리 적발을 위해 부패 신고 사건을 공정거래위원회, 경찰청, 조달청, 시도교육청 등 관계기관에 이첩하기로 했다. 또 계약 단계별 제도 개선 방안을 조달청과 시도교육청에 권고할 방침이다.
◇ ‘학교 조달’은 싸게 사는 문제가 아니라 공정하게 사는 문제다
이번 사건은 학교 조달의 약한 고리를 드러낸다. 모듈러교실은 긴급성과 편의성이 중요하다. 공사 기간 중 학생들이 쓸 공간을 빨리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발주기관은 이미 등록된 제품을 비교해 선택하는 방식을 선호할 수 있다. 그러나 빠른 조달이 공정한 경쟁과 품질 검증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교육 분야 조달은 일반 공공조달보다 더 엄격해야 한다. 사용자가 학생이기 때문이다. 가격 담합은 예산 낭비로 끝나지 않고, 품질 관리 부실은 건강과 안전 문제로 이어진다. 실내공기질 측정 같은 기본 절차가 부실했다면, 발주기관과 교육청은 단순히 업체 책임만 따질 것이 아니라 사후 검수 체계가 제대로 작동했는지도 함께 점검해야 한다.
핵심은 제도 개선이다. 카탈로그 계약에서 제안가격 산정 기준을 명확히 하고, 입찰 참여 업체 간 특수관계와 반복 수주 패턴을 사전에 걸러낼 장치가 필요하다. 특정 업체에 유리한 평가항목이 들어가지 않도록 표준 평가기준을 마련하고, 실내공기질·안전성 등 품질 검증 결과를 공개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이번 사안은 ‘업체 몇 곳의 일탈’로 끝내기 어렵다. 최근 4년간 99건, 1300억원 규모라면 이미 시장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모듈러교실은 임시 시설이지만 학생들이 머무는 교실이다. 임시라는 이유로 가격 검증과 품질 관리를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학교 예산이 제대로 쓰였는지, 학생들이 안전한 공간에서 수업받았는지부터 다시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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